손목에 시계를 차고, 시간을 느끼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손목에 시계를 다시 찼다.
스마트폰이 시계를 대체한 뒤로는 시간 확인조차 디지털 화면을 통해 해왔지만, 어느 순간 그게 피로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보겠다고 켠 스마트폰에서 결국 메시지를 확인하고, 인스타그램을 열고, 그렇게 몇 분을 뺏기고 나면 ‘내가 원래 하려던 게 뭐였지?’ 하는 순간이 반복됐다.
그래서 아날로그 시계를 하나 구입했다. 기계식은 아니더라도, 클래식한 디자인의 쿼츠 시계. 처음엔 단순히 '시간 확인을 빠르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였지만, 그 변화는 의외로 깊었다.
우선, 시계를 보기 위해 손목을 드는 동작 자체가 자기 의식을 회복하는 행위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무의식적으로 들지만, 시계는 의식적으로 본다. 그 몇 초 사이에 “지금 나는 왜 시간을 확인하는가?”,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자주 떠올리게 됐다.
또, 스마트폰으로는 ‘시계’라는 기능 하나를 쓰기 위해 수많은 방해 요소를 지나야 하지만, 손목시계는 온전히 시간만을 보여주는 도구였다. 그 단순함이 나를 새롭게 정리해주었다.
하루는 스마트폰 없이 외출했던 날, 시계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시간을 흘러가는 느낌으로 인식했다.
아침 9시, 점심 12시, 오후 3시… 스마트폰이 아닌 손목에서 흐르는 시간은 분주하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나의 리듬을 되찾아주는 도구였다.
아날로그 시계를 찬 후, 나는 시간을 쫓기보다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단 몇 번의 손목 올림 속에서, 나는 더 명확한 하루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디지털 메모 대신 펜과 종이로 나를 정리하다
나는 꽤 디지털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할 일 목록은 Google Tasks, 캘린더는 Notion, 메모는 iOS 기본 앱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점점 알림과 동기화, 분류 기능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일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기록하려다 지쳐버리는’ 느낌이랄까.
어느 날부터 노트를 꺼내기 시작했다. A5 사이즈의 얇은 무지 노트, 그리고 좋아하는 만년필 하나.
시작은 단순했다. 하루의 할 일을 손으로 써보는 것.
그런데 그 손글씨 한 줄 한 줄이 내 마음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곧 알게 됐다.
디지털 메모는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너무 차갑고 기계적이다.
그에 비해 종이에 쓰는 행위는 감정이 개입되고, 흐름이 생기며, 흔적이 남는다.
글씨가 삐뚤어지기도 하고, 한 줄 건너 다시 적기도 하지만, 그 모든 ‘비효율’ 속에서 나는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
특히 중요한 건, 기록을 하면서 동시에 ‘생각’도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디지털 메모는 입력만 하고 끝날 수 있지만, 아날로그 메모는 쓰는 행위 자체가 ‘정리’다.
오늘의 감정, 놓친 일, 떠오른 아이디어—all on paper.
하루가 끝날 때면, 그 노트 속의 흔적들이 내가 ‘살아낸 하루’를 말없이 증명해주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자, 종이에 쓰는 루틴은 단순한 습관을 넘어 나만의 의식 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보다,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주는 고요한 시간.
아날로그 메모는 내 디지털 피로를 말없이 품어주는 가장 따뜻한 도구였다.
종이책을 다시 펼쳐보니 집중과 감성이 돌아왔다
전자책이 아무리 편해도, 종이책만이 주는 감각은 따로 있다.
최근 나는 일부러 전자기기를 멀리하고 종이책을 가까이하는 실험을 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의 감각, 종이에서 느껴지는 잉크 냄새, 밑줄 긋고 메모하는 행위—all of that.
종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온전히 ‘하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몰입감이었다.
스마트폰으로는 책을 읽다가도 메시지가 뜨거나, 갑자기 검색하고 싶어지거나, 다른 앱을 열게 되는 일이 빈번했지만, 종이책은 그런 방해가 없다.
읽기 시작하면 그 공간에 그대로 잠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더 깊게 내 안에 스며든다.
전자책으로 읽은 문장은 금세 잊히는 반면, 종이책에서 밑줄 긋고 접어둔 구절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어쩌면, 디지털의 스크롤은 ‘소비’에 가깝고,
아날로그의 독서는 ‘경험’에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 신기했던 건, 종이책을 읽은 날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디지털 콘텐츠는 자극적이고 빠르지만, 종이책은 느리기에 여운이 남고, 그 여운이 사유로 이어진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오래 머문다.
그건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감정과 연결되는 독서였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전자책을 사용한다.
하지만 하루 중 단 30분이라도 종이책을 읽는 시간은,
내 뇌를 디지털 소음에서 끌어내어 고요한 언어와 연결시켜주는 귀중한 루틴이 되었다.
마무리: 느림과 불편함 속에 되찾은 감각
디지털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하루 중 일부라도 아날로그 도구로 대체해보는 일은,
단순한 실험을 넘어 삶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시계를 보며 시간을 인식하고
손글씨로 마음을 정리하고
종이책으로 감성을 회복하는 이 루틴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사람다움’을 되찾는 작은 복원 작업이다.
화면을 덜어내니,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감각은 내 일상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